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하인리히 힘러 (문단 편집) === 유년기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px-Himmler7.jpg]]|| || 1907년의 하인리히 힘러 || 학교 교장인 아버지와 평범한 가정주부인 어머니 사이에서 3남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바이에른 왕가의 왕족에게 개인교사를 한 인연이 있을 정도로 [[뮌헨]]의 높은 어르신이었고 이 연줄로 출생시 [[비텔스바흐]] 왕족 중의 한 명이 그의 대부가 되어주었다고 한다. 어렸을 때의 '''취미는 책읽기와 공부'''였던 착한 아이였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많은 독일 청년들이 그랬듯이 전쟁에 들떠서 자원 입대하려 했었고 병사보다는 장교로 참전하려 했는데 애초에 1순위였던 해군에서는 시력 때문에 거부당하고, 육군에서도 신검 기준에 미달했지만 아버지가 사회경험 해보라고 빽으로 밀어줘서 사관후보생으로 제11바이에른 연대에 입대했으나, '''단 한 번의 훈련도 못해보고 전쟁이 끝나버려 결국 참전하지 못했다. 거기서 한거라곤 장교 구두닦기나 장교 전용 변소 청소, 세탁물 정리, 감자 깎기, 접시 닦기 따위의 잡일 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힘러는 입대할 당시 고작 17세에 불과했다. 결과적으로 전쟁의 실상을 겪어보지 못하면서 나중에 전쟁을 동경하고 낭만적인 환상을 가지게 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명목상으로는 사관후보생으로서 제11바이에른 연대 베테랑 반장이었기 때문에 종전 후 기술학교[* 현대 한국의 실업자 전문기술대학에 해당한다.] 입학과 함께 비참한 독일의 현실에 분노하는 참전병들이 모여 결성한 [[자유군단]][* 자유군단은 정식 협회나 단체는 아니고 독일이 연합국에 휴전(사실상 항복)하고 대부분의 군대를 해산하자 퇴역한 군인들 중 우익 성향의 장병들이 결성하여 좌파 폭동을 진압하거나 [[폴란드]], [[체코]] 등 신생 국가와의 국경 분쟁에 나선 무장조직이다. 곳곳에서 사회주의 폭동이 터지고 [[베르사유 조약]] 때문에 정규군 규모가 제한받고 활동이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었으므로 정부는 이들 참전자들이 무장하여 좌익 반란을 진압하는 것을 묵인했다.]에 들어가 활동했다. 이 시기 동거녀 살해 혐의[* 매춘부였고, 동거 중임에도 불화가 깊었다는 주변의 진술에 따라 혐의를 받은 것이나 명백한 증거는 없었다.]를 받아 체포됐는데, 관련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훗날 SS의 수장으로서 독일 경찰권 전반을 손에 넣은 이후 관련 기록을 말소한 것으로 추정된다. 재판 결과는 증거 불충분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